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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2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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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삐뚤 달리고 넘어져도 재미있다”이글스어린이하키클럽

새하얀 얼음판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스틱을 날렵히 움직이며, 좌우로 어깨를 들썩이며 더 빨리, 더 빨리. 요리조리 기민한 몸놀림으로 상대 선수들을 앞서나간다. 머리끝을 앞으로 내민 혼신의 스피드. 마치 한 점 먹이를 향해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

“패스! 패스! 센터로 패스!”


순식간에 골문 앞. 솨아악, 질풍같은 드리블을 멈추고 번개처럼 강슛을 날린다. 순간, 축구 골대처럼 한없이 넓어 보이는 느낌. 온 몸의 짜릿한 감각. 그래, 골이다!


지난 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탑동 실내아이스링크. 빨간 유니폼을 차려 입은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빙판을 누비고 있었다. 추운 날씨, 차가운 얼음판이지만 한증막처럼 뜨거운 열기가 뿜어나오는 듯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유니폼, 가쁘게 몰아쉬는 숨이 하얀 입김으로 공중을 채웠다. “파이팅!”. 우렁찬 목소리가 허공을 찔렀다.


그런데, 어쩐지 무거워 보였던 헬멧과 마스크를 벗은 걸 보니 얼굴이 조그맣다. 울퉁불퉁 우람한 덩치로 보였는데 알고 보니 초등학생 아이들. 큼지막한 보호장구를 받쳐입고 있으니 마치 소인국 사람이 거인국 옷을 입은 듯 덩치가 두 배쯤 커보인다.


이글스 어린이하키 클럽(www.eagles-hockey.com). 지난해 창단한, 국내에서 몇 안되는 어린이 아이스하키 팀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이스하키는 알다시피 인기 종목이 아니다. 국가대표 실력도 세계 무대에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수준이다. 흔한 말로 ‘저변이 두껍지 못한’ 탓이다. 초등학교 단위의 팀도 차례로 문을 닫아 지금은 고작 5~6곳만 남아 있을 정도다. 이글스 멤버들은 이런 와중에서도 제발로 아이스하키를 배우러 찾아온 ‘흔치 않은’ 아이들이다.


나중에 기필코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이름을 날리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시작한 아이는 물론 없다. 하지만 “하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나중에 대표 선수가 되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아이들은 많단다. 극소수만이 특기생으로 뽑혀 자나깨나 운동만 하는 쪽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바람직해 보이기도 한다.


“빨라서 재미있어요. 골을 넣을 때가 제일 좋아요. 이기면 기분이 좋지요. 컴퓨터 게임보다 훨씬 더 재미있어요. 컴퓨터 게임은 지루하잖아요”


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가는 민권기군(14)은 아이스하키 경력 1년으로 팀내 최고참이자 주장. 공부는 잘해도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아이스하키를 배우고 나서는 ‘씩씩한 터프가이’로 변했다. 빙판 위를 종횡무진 누비는 그의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몰라볼 정도였다.


분당에 사는 전효정양(8)은 팀의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힘들텐데 그만두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몸이 튼튼해져요. 감기도 안 걸렸어요”라고 또랑또랑 답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글스 클럽의 여자 선수 3명 중 맏언니인 홍유리양(12)은 “여자들에게 흔하지 않은 운동이라 더 좋다”고 했다. 클럽의 여자 선수 셋은 모두 더 빠르고 날렵해야 하는 공격수를 맡고 있다고 했다.


감독 김성수씨(32)는 “처음 시작할 때 망설이는 아이들은 많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대충 하다 그만두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아이들이 아이스하키를 좋아하게 되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그게 무엇일까.


“시원하고 상쾌하잖아요”(권현진·11)


“숙제를 안해도 링크에 간다고만 하면 엄마가 야단도 안 치세요, 크큭. 실은요, 여럿이 한 팀으로 뛰어야 하니까 협동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조중민·11)


“체력이 강해져요. 남보다 먼저 뛰어가야 하니까요”(민재호·9)


“머리도 좋아져요. 힘만 있다고 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거든요. 머리를 많이 써야 돼요”(이재일·12)


아이들다운, 그러나 제법 진지한 ‘아이스하키 예찬론’이다. 거칠어서 위험해 보이는 몸싸움. 그래도 넘어질 듯 오뚝이처럼 금세 균형을 잡고 일어나는 아이들. 지칠 줄 모르고 즐겁게 뛰논다. 사각의 링크를 놀이터로 삼았다. 몇몇 아이는 세계 챔피언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도 안다. 남들이 잘 하지 않고, 남들이 어렵다고 겁내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자신있게 해내는 ‘특별한 재미’를. 커서도 그 재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들의 세계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다. 억지로 하면 싫다. 아이스하키든 아니든.



-[취재수첩]“아이스하키는 움직이는 비만클리닉”-


김성수 감독과 강재훈(32)·홍정환(32)·이종훈(30)·이동훈(28) 코치. 이글스 어린이 아이스하키 클럽을 이끌고 있는 코칭 스태프다. 국가대표팀 동료·선후배로 만난 사이. 고려대·광운대·경희대 등 아이스하키 명문 대학팀을 나와 석탑건설·현대오일뱅커스 등 실업팀에서 활약했다.


선수 유니폼은 모두 벗었지만 그들은 링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있기로 뜻을 모았다. 보다 많은 어린이들을 아이스하키 꿈나무로 키우는 일을 자신들의 책임이자 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스하키 코치 일만으론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링크를 빌리는 일도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코치 중 몇몇은 낮에 따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다른 몇몇은 아이스링크 소속 직원이나 강사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아이스하키는 전신을 쓰는 운동이라 어린이 건강에 큰 도움이 돼요. 특히 비만 어린이에게는 ‘움직이는 비만 클리닉’ 역할을 하지요. 외국식 클럽방식으로 주말에만 운동하니 공부에도 지장이 없고요. 수강료도 여느 학원 수준이에요. 어려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해봐서 모르는 운동이지요”


‘국내 유소년 아이스하키 붐을 일으키겠다’는 목표를 세운 이들은 지난해 봄부터 수원·분당·일산 등에 차례로 어린이 클럽을 열었다. 수원은 레드이글스, 분당은 화이트이글스, 일산은 블루이글스. 현재 레드에는 30명, 화이트에는 10명, 블루에는 17명의 어린이가 참여하고 있다. 매주 토·일요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강습을 받고 실전 아이스하키를 즐긴다.


코치들은 앞으로 전국의 각 지역 단위로 이글스 어린이 클럽팀을 늘려나갈 작정이다. ‘돈벌이’만 생각해서 아이들이 몰리는 한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국 각지로 아이스하키 클럽 문화를 확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만간 4~5개 팀이 갖춰지면 바로 지역 연고제를 바탕으로 한 정기 리그도 열 계획이다. 아이들이 박진감 넘치는 실전 경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다. (02)734-1487


/수원/차준철기자 cheol@kyunghyang.com/

정정 : 분당 블루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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